01. what
02. how
03. storytelling
04. prototyping 上
05. prototyping 下
요즘 이곳저곳에서 스토리, 호은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사용한다. 스토리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야기'라는 뜻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테지만, 스토리텔링을 우리말로 옮겼을때 무엇일지는 바로 확 떠오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네이버 사전님을 찾아보니.. 스토리텔링은 구연동화 할 때의 그 '구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구연이라면..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행동(아래 그림)일텐데, 그렇다면 듣는 이가 제대로 상상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것이 그 본질이 아닐까 싶다.
게임의 유저경험을 기획해 보자는 이 글에서 다루는 스토리텔링은 '완결되는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게임을 관통하는 주제(테마)로써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전 2회의 what & how 내용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게임을 구체적인 내러티브로 만들어내는 것을 우선 다뤄보고자 했고, 이제는 그렇게 구상해 본 내러티브를 어떻게 기획 과정에 적용해 들어갈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스토리라 말하는 것은 기-승-전-결의 선형적이고 서사적 구성을 갖는, 사전 그대로 '이야기'이다. 소설, 영화, 만화, 게임 등 모든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러한 구성 속에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이 등장한다. 이 요소들이 의도된 주제를 관통하여 흘러가고 완결되어짐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성적 대리 경험의 재미를 전달한다.
이 구성를 게임만의 관점에서 보자. 가장 크게 차이날 수 있는 부분은, 게임의 유저는 플레이어가 되어 등장인물의 행동을 조작하고 그를 통해 배경과 사건에 상호작용함으로써 조금씩 다른 선택지를 통해 여러가지 결과를 볼 수 있는 특징을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도된 이야기일지라도 반드시 하나의 선형적 단방향성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고, 특히나 끊임없이 업데이트 되어야 하는 온라인 게임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기존의 이야기 구성과는 다른 작업을 요구하게 된다.
이 때문에 게임에 있어서의 스토리는 제작을 하며 부딪힐 수 있는 기술적인 변경사항이나 일정 상의 한계, 레벨디자인 등의 컨텐츠 제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미 문제 등을 고려한다면 전혀 바뀌지 않는 완전히 마무리 되어있는 형태로 짜놓고 들어간다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그렇다보니 온라인 게임의 초기 기획 단계에서는 어떤 완결된 스토리를 쓴다기보다 Look&Feel 및 목표점을 지정하기 위한 세계관과 전투(혹은 주요 플레이 행동) 플레이 구성을 위한 직업(혹은 종족)을 중점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많은 기획자들이 오해하고 실수하는 부분이 발생한다. 그것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 유래와 유구한 역사, 지역과 인물 등등을 WoW급으로 구축하고 설명하는데 온갖 열정을 쏟아부어 수십장에 이르도록 장엄한 스토리 기획서를 작성하게 될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덕분에 몇 개월에 걸쳐 머리를 짜내어가며 쓰여졌을 그 이야기들은 실로 엄청나게 방대한 세계를 제시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개발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조차 쉽게 몰입해 읽기 힘들 정도로 길고, 지루하며, 복잡하다. 개발자는 자신이 맡을 요소가 아니라면 귀찮아지는 탓도 있겠지만, 플레이어라 해도 당장 실제적으로 내 아바타가 직접 부딪히게 될 사건과 할 일에 관심을 갖게 되지, 200년 전 왕위 찬탈 사건의 음모와 그에 관계된 몇대 후손의 불타오르는 복수심이 왕국을 무너뜨리려 어쩌구 등등 따위의 게임에 당장 드러나지도, 경험되지도 않는 백과사전식 인물/사건/배경에 감정을 대입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고 바이오쇼크 시리즈를 만든 Ken Levine은 GDC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기도 했다.
"The bad news is for storytellers is that nobody cares about your stupid story...
no matter how detailed or lovingly you craft it."
"스토리텔러에겐 좋지 않은 얘기지만, 당신이 얼마나 상세하게 썼건 애정을 갖고 썼건 간에
아무도 그 바보같은 이야기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전체 개발 과정에서 본다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될 때의 일관된 방향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런 사전적 기획이나 소설 같은 이야기도 필요할 수 있겠지만,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이런 결과물은 오히려 유저경험의 감성적 재미를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것에 오히려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차라리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도로 정리된 내러티브에서 시작해 확장하는 것이 더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즉, 스토리텔링으로 기획하고 커뮤니케이션 하자는 것은 완전히 마무리 되어진 이야기를 쓰자는 것이 아니라 테마를 관통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그를 통해 (앞으로의 전개 상황까지 포괄할 수 있는 형태로) 플레이어가 맞닥뜨리게 될 경험을 다루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 본 사례가 있을까.
위의 테마는 그라나도에스파다의 개발 초기 모티브로, 길지 않지만 하나의 좋은 스토리텔링 내러티브의 사례라 볼 수 있다. 오히려 방대한 양의 텍스트보다 이렇게 잘 짜여진 강력한 내러티브 하나가 더 쉽고 효과적으로 유저경험을 기획하는데 도움이 된다. 여기에서부터 플레이어가 놓여질 상황에 대한 전제(신대륙 개척 판타지)가 확실하기 전달되어 어떤 배경이 등장해야 할지, 어떻게 에픽 퀘스트 등을 구성할지, 어떤 미시/거시 목표를 갖도록 만들어야할지 비교적 쉽게 추론할 수 있게 만들고, 거기에 초기부터 기획된 큰 특징인 3인 MCC (Multi Character Control)나 개성적인 NPC 영입 같은 고유의 요소가 플레이어의 '가문'이라는 개념을 통해 용병들을 고용한 모험이라는 기능 요소까지 포괄할 수 있게끔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GranadoEspada ⓒ IMCgames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퍼즐이나 보드 게임 같은 것이 아닌, 캐릭터 기반 게임의 내러티브를 정리해나갈 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콘솔 머신이나 스마트폰으로 출시되는 싱글 플레이 기반의 게임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아직까지 개발자 다수가 몸 담고 있을 온라인 기반의 게임들에 있어서는 그 캐릭터를 사용하는 유저경험의 허용 한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싱글 게임은 대부분 엔딩이 존재하는 완결된 이야기를 갖기 때문에 등장인물 또한 놓여진 상황 속에서 주변인물들과 함께 대화하고 행동하는 입체적인 성격의 표현과 능동적인 행동으로 플레이어에게 이야기에 대한 감정 몰입을 유도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온라인 게임에서의 등장인물은 플레이어의 아바타일 뿐 스스로 상황에 녹아들어 혼자 혹은 어울려 말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플레이어의 입력과 선택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피동적 성격을 갖기에 스토리에 대놓고 감정 몰입을 유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통상적인 온라인 게임의 기획 단계에서 캐릭터의 성격과 어투, 주변인물들과의 관계에 의한 이야기적 설정보다는 직업/종족 같은 전투나 액션 플레이 스타일의 차이를 설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궁수 = 원거리 공격형 딜러' 같은 기능적 요소에서 출발함으로써 캐릭터에 어떤 감정적 개입을 유도하는 장치를 넣지 않거나, 시그니처 캐릭터화 하여 '악마에게 부모를 잃은 19세 소년 샘 윈체스터' 같이 이야기를 포함해 넣더라도 게임 내에서는 액션 플레이 차이 이외엔 어떤 캐릭터이던 진행분기에 영향을 주지않게되어 실질적으로는 스토리텔링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전투에서의 감정 몰입이 스토리의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재미있는 경험으로 인식될수록, 나머지는 그를 위한 귀찮은 과정이라고 여겨지기 쉽다. 이렇게 굳어지다보면 대화창에 뜨는 길디 긴 텍스트라던지 별로 재미도 없으면서 시간만 끄는 강제 연출씬 같은 '스토리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기획적 의도' 따위는 빨리 스킵하고 싶은 귀찮은 것일 뿐으로 여겨지게 되고, 플레이어는 그저 빨리 저널 UI에 퀘스트 리스트와 요구조건만 띄우고자 하거나 빠른 성장을 위한 매크로질에 집중하게 된다.
이쯤 되면 사실 게임의 스토리를 제대로 전달한다는 것은 기획자에게 크나큰 부담이자 난관으로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이를 반영해 스토리의 비중은 덜어내고 장르적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게임 플레이 혹은 기능적 측면에 더 집중해 기획하게 되면 오히려 몰개성하게 보이거나 너무 쉽게 소모되고 질려버리는 악순환을 맞이하게 되기 쉽다.
때문에 근래의 대작 지향형 게임들에서는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방법으로써 '의도된 게임의 내러티브'에 적절한 스토리를 여러 방법으로 전달해 전투 이외 감성적 경험의 재미를 높이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스토리라는 것이 꼭 반드시 정해진 이야기만을 강요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런 방법이 아닌 게임의 기능이나 규칙에 의해서 자신이 길드장이나 길드원이 되어 서버 최초로 거대 용을 쓰러트린다던지 자꾸 PK를 하는 악질 유저를 누군가가 대신해 처단해주었다던지 하는, 창발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우화가 생겨날 수도 있다.
하지만 창발적으로만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부분은 일반적인 다수의 유저나 혼자 노는 유저에게 전달될 수 있는 평균적인 경험으로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기획 단계에서는 내러티브가 부여한 상황을 끌어낼 수 있는, 호칭이나 도전과제 등의 추가 보상요소를 통해 쉽게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좀더 의도적인 창발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말한 내러티브가 부여한 상황을 기획적으로 풀어내 유저경험으로 만들고, 그를 통해 시스템이나 컨텐츠를 만들자는 스토리텔링 기획 과정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정리할 수 있다.
1. 게임이 지속적으로 관통할 내러티브 / ref. what 2. 테마가 부여할 수 있는 상황, 키워드 / ref. how 3. 해당 상황이 요구하게 되는 게임플레이(행동) 아이디어 도출 4. 해당 게임플레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시스템기획 아이디어 도출 5. 해당 행동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컨텐츠(레벨)기획 아이디어 도출 6. 그 중 적절한 아이디어들을 구체화하고 엮어가며 각각 프로토타이핑/시뮬레이션 후 선별 채택 |
게 임의 주 내러티브를 정하고 거기에서 키워드를 뽑아 게임 플레이화 하고, 그를 통해 시스템과 레벨을 기획한다는 것, 그를 통해 '의도된 기획을 온전한 감성적 재미의 유저경험으로 만들어보자'가 이번 UX 연재를 통해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그럼 위의 순서에 맞춰 한시간 정도 머리를 굴려본;; MMORPG의 구체적인 기획 사례를 한번 보자.
1. 내러티브
멀지 않은 미래, 엄청난 과학기술로 무장한 외계인들이 자원을 노리고 지구를 침공해 와 대부분의 인류가 절멸한 세계.
국가와 경제는 붕괴되었고, 생존자들은 살기 위해 외계인에게 투항하거나 은밀히 세력을 규합해 저항해 나가야 한다.
2. 키워드
근미래SF, 생존, 세력, 저항, 탈환, 인질, 외계기술, 배신, 투항, 스파이, 갈등, 외계인 ...
3. 게임플레이
근미래SF - 모듈화 되어 개조 가능한 총기/장비/탈것 등이 가능하다. 근미래니까 레이저건이나 워프 같은건 배제한다.
생존/세력 - 지속적으로 자원과 무기를 확보해 세력이 힘을 잃지 않고 전투하며 기지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저항/탈환 - 비교적 안전한 지역을 확보하고 외계인이 점령한 지역을 탈환해 거점을 넓혀나가야 한다.
인질/외계기술 - 잡혀있는 인질을 구하고 기술을 탈취함으로써 인력, 기술, 자원 등의 인프라를 확보해야 한다.
투항/배신 - 투항함으로써 안전과 생존을 확보하되, 저항군과 대립하며 그들의 인프라를 파괴하고 재탈환해야 한다.
갈등 - 저항세력과 투항세력이 중립거점이나 상호 점령지탈환을 위해 직접적으로 대규모 전쟁을 치뤄 그 이익을 취한다.
외계인 - 그 안에서도 파벌을 나뉘어있어 투항/저항 세력 모두에 영향을 주는 균형 장치로써 조커 역할까지 하게끔.
등등...
4. 시스템
플레이어는 생존자로써 일단 개인적인 저항자로 시작하지만 일정 레벨이 되면 저항 혹은 투항 세력에 속할 수 있다.
세력에 속한다해도 다시 배신하고 다른 세력으로 갈 수도 있다. 이 경우 일정한 패널티가 부과될 것이다.
세력 간 특정 지역에서 PvP 및 RvR이 가능하다. 별도의 모드로써 상위 UI 단에서 접근 가능하게 하는 것도 고려해볼만.
각 세력마다 기지라는 개념의 큰 도시가 각각 존재하고, 그 안에서의 경제과 거래는 인력, 기술, 자원을 통해 이루어진다.
소속된 세력이 갖는 인프라에 대가를 지불하고 이용할 수 있고, 퀘스트와 보상을 통해 인프라를 더 강화할 수 있다.
총기/장비/탈것을 아이템으로 조합/분해 할 수 있게 하고, 제작물은 세력 인프라로 테크트리 타 강화할 수 있게 한다.
PvE가 이루어지는 일반 지역 이외에, 특정 세력이 차지할 경우 그 이용자에게 세금을 걷어주는 PvE 지역이 존재한다.
등등...
5. 컨텐츠
캐릭터 레벨보다는 스토리에 의해 출입 가능 지역이 확장되게 하되, 에픽별 스토리 끝 보스의 난이도를 성장에 맞춘다.
에픽퀘 주요흐름을 탐색-정찰-점령/탈환으로 깔고, 구출/잠입/탈취/파괴 같은 연출 포함 퀘 첨가해 스토리를 강화한다.
비단 연출씬 뿐만 아니라, 레벨에 있어 동적으로 반응하거나 움직이는 지형지물을 활용해 상황적 몰입을 유도한다.
메인/서브퀘를 통해 의뢰된 내용의 연계 인물이나 사건을 협력/추적/회수하도록 해 인물 간 관계적 몰입을 유도한다.
서브퀘의 결과 분기를 다양화, 그에 따라 다른 효과가 걸려있는 호칭을 취득하게 해 창발적 재참가를 유도한다.
에픽퀘에 있어서 저항세력과 투항세력이 확연히 갈려 진행되는 루트가 존재하고, 그 끝에 서로 PvP 하게끔 유도한다.
몬스터의 레벨 내 등장 타입을 퀘의 특성에 맞게 바꿔쓸 수 있도록 일반/로밍/습격/포위/전선/추척 등으로 정리한다.
등등...
위의 기획을 한꺼번에 본다면 각자 기획한 일반적인 방법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3, 4, 5번이 유사해 보일 수도 있지만, 디렉터 혹은 기획으로부터 명확히 의도된 비전으로써 내러티브를 끌어낸 후 이 스토리텔링의 방법을 사용해 순차적으로 접근/기획해 간다면 분명 일관성을 가진 흐름에서 각자의 특징을 가진 게임 플레이 요소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고, 그를 통해 좀더 의도적인 유저경험을 떠올려가며 실제 개발에서 커뮤니케이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유저경험의 감성적 재미를 고려해 기획하고, 모든 팀/파트 간 협업에 있어 '왜 만드나?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무슨 연관이 있나?' 같은 소모적인 과정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줄여갈 수 있다면 좋겠다.
다음 연재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바탕으로 실제 플레이 모습을 구체적으로 끌어내어 개발/비개발 영역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감성적 재미에 대한 부분을 검증하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 사전영상화 프로토타이핑(pre-visualization prototyping)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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