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UX 기획 마지막편을 남기고 개인적인 이유로 한달여간 쉬게 되었습니다. 원고를 위해 키워드들은 정리해 놓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건지 마무리를 빨리 못짓겠네요. 그래서 이번엔 잠시 다른 얘기를 써볼까 합니다.
국내에서 액션이나 RPG를 위시한 게임의 개발 기획 영역은 크게 시스템 디자인과 컨텐츠 디자인으로 나눕니다. 이 중 컨텐츠 디자인은 아이템이나 스크립트, 레벨 등등 포괄하는 범위가 좀 넓은 편이라, 그만큼 다방면으로 얽혀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레벨 디자인 같은 경우는 그 범위가 크고 아름답기에 아예 시스템/컨텐츠와 비등한 단계로 보기도 하지요.
레벨 디자인은 공간을 만든다는 부분에서 그래픽 파트와 얽히고, 상황에 따른 분기나 이벤트 트리거 등을 설치한다는 측면에서는 스크립트 파트와, NPC나 오브젝트를 배치하고 전투를 구성한다는 측면에서는 AI 파트와, 배치된 개체들의 속성값과 변수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시스템 파트와도 얽힙니다. 그만큼 실질적으로 플레이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체험하게 될 게임 플레이를 만드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 의도가 분명하게 들어갈수록 재미있어지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레벨 디자인의 본질은 캐릭터가 놓여지고 이동하게 될 동선으로 구성된 입체적/평면적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NPC나 오브젝트 등의 대상을 배치함으로써 플레이어의 행동을 촉발시키고 다변화시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 위를 이동하면서 길을 찾거나, 주변을 배회하는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피하고, 주변의 환경을 조사해보고 채집하거나 봉인을 푸는 등 캐릭터의 성장과 수집에 필요한 시간을 소요시키는 공간으로써 사용됩니다.
플레이어는 이렇게 준비된 레벨을 플레이하면서도 최소의 시간과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고자 합니다. 자신의 캐릭터 레벨이나 퀘스트 상황에 맞춰 필요한 곳에서는 사냥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빨리 이동하려고만 할 것이고, 사냥을 한다면 가장 짧은 시간 내 처리할 수 있도록 몬스터의 특성을 파악해 장비를 맞추고 스킬을 사용할 것입니다. 맞닥뜨린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적합한 대응을 하는 행위를 메커니즘으로 본다면 '최적화'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랄프코스터의 재미이론에 따르자면, 주어진 난관을 학습과 도전을 통해 극복했을 때 보상하는 형태로 재미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난관을 맞닥뜨리게 되면 긴장하게 되고, 난관을 해소한다면 이완하게 되는 인간의 심리와 연계되는 것이겠죠. 게임에서는 몬스터 혹은 트랩, 심지어는 적대 세력 같은 대립되는 상대가 등장해 캐릭터의 진행을 방해하려 합니다. 이러한 요소를 거리 관계에 대입해 본다면, '적'이 가까이 온다는 것은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플레이어의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반대로 '적'이 멀어진다는 것은 '내 피해를 줄이면서 대응할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플레이어를 이완시키는 형태로 그려지게 됩니다. 거기에 갑작스럽게 맞닥뜨리는 몬스터나 트랩은 플레이어의 긴장감을 극대화시켜 드라마틱한 대응을 요구함으로써 재미를 끌어올리게 되죠.
이러한 거리 관계 메커니즘은 Vector Poem의 Coelacanth : Lessons from Doom(1993)라는 글을 통해 아래처럼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 DOOM의 플레이는 근래의 현실적 FPS와는 달리, 추상적인 액션 자체에 집중해 있다
- 내 행동은 빠르지만, 상대는 느리게 행동하는 주제에 되도록 나에게 근접하려고 한다
- 날아오는 발사체를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슈팅 플레이를 갖는다
> 따라서, 유저는 상대 개체/그룹과 거리를 유지해가며 효율적으로 때려잡아야 한다
하지만 FPS나 TPS처럼 시야 내에서의 거리 관계를 통해 기민하게 행동해야 하는 액션 게임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MMORPG를 하더라도 파티 플레이에서 몬스터 그룹이나 AI를 고려해 마킹하고 매즈하며 진행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동일한 메커니즘이 분명 그 안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리와 긴장의 함수 관계에 다양한 변곡을 줘 그 재미를 확장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긴장과 이완을 조율하는 확장적인 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일단은 가장 대표적인 방해 요소인 몬스터의 다양한 속성을 통해 확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AI에 따른 선공/비선공을 비롯해 이동 방식의 차이 및 접근 속도, 원거리/근거리 공격, 일정 거리 유지, 추적 같은 고유의 값이 차등화 되고, 그런 다양성을 갖는 몬스터가 어떻게 조합 배치되며 스폰되는지에 따라 같은 공간에서도 상당히 다른 변주를 가능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아래의 공간 최적화 변주의 기준을 본다면, 더 많은 기준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거리형 : 인지 거리/각도 안에 들면 반응, 인지한 대상에 다가오거나 도망, 거리를 유지하며 이동 공격해 공간 최적화를 방해
예) 스타크래프트 : 닥템으로 히드라 썰고 싶은데 얘들이 자꾸 도망가면서 침 뱉어서..
- 상태형 : 갑자기 캐릭터를 붙잡거나 매즈를 걸어 잠시 이동불가 혹은 상태이상을 촉발해 공간 최적화를 방해
예) 던전앤파이터 : 냉기 걸리면 좌우이동 연타해야만 이동불가가 해소..
- 이동형 : 밀거나 당기는 형태로 캐릭터의 위치를 직접 옮김으로써 캐릭터의 공간 최적화를 방해
예) 레프트4데드 : 스모커가 갑자기 파티 한명 잡아 당기면 어딨는지 찾느라 정신이 아득..
하지만 전투 중 짜증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면, 플레이어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 혹은 시야 내에 문제의 원인이 보여질 수 있도록 레벨 디자인 되어야 합니다. TPS나 FPS 시점에서는 시야 범위가 한정되기 때문에 L4D에서 스모커가 날 붙잡던지 어디선가 부머가 오바이트 하면 순간 놀라 카메라 돌려서 어느 쪽인지 확인하려고 더 긴장감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근거리/원거리 몹을 조화롭게 배치하지 못하고 언차티드3의 배 무덤처럼 스나이퍼 몹만 죽어라 리스폰한다던지, 에어리언브리드3처럼 쿼터뷰인데 화면에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 있는 몬스터가 쏜 발사체가 날라와 나를 맞춘다던지 하는 부분 = 나의 피격 원인을 곧바로 파악할 수 없는 배치와 몬스터의 공격 범위 등은 그저 짜증만 유발할 수 있습니다.
몬스터를 통한 공간 최적화 변주와 마찬가지로, 지형과 지물을 통해서도 플레이어의 공간 최적화 욕구에 허를 찌르는 긴장 구성을 의도할 수 있습니다. 시점 상에 가려지는 사각 지대 영역을 동선 상에 배치한다던지, 층 혹은 높이에 의해 나뉘어 있어 곧바로 확인해 볼 수 없는 지형 같은 구성을 통해 거리와 인지 관계의 변주를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이 지형/지물의 구성을 동적 사물 혹은 몬스터 스폰과 함께 사용함으로써 난이도와 소요 시간을 쉽게 조율할 수도 있습니다.
- 제약형 : 이동 경로 앞/뒤를 차단해 강제적으로 좁은 지역 내 마음대로 이동 못하게 만들어 공간 최적화를 방해
예) 데빌메이크라이 : 특정 공간을 쪼개서 그 안에 몹 다 잡기 이전엔 앞으로도 뒤로도 못나가..
- 함정형 : 주기적으로 발동되는 바닥 트랩이나 무빙 타일을 이용해 타이밍을 잡아 움직이도록 공간 최적화를 방해
예) 마비노기영웅전 : 회전 칼날이나 가시 톱니바퀴가 움직이는 패턴 파악하고 움직여야.. 몹에게 역이용 가능!!
- 전선형 : 캐릭터의 경로/위치에 따라 몹이 포메이션을 형성하고 스폰함으로써 전선을 형성해 공간 최적화를 방해
예) http://www.slideshare.net/aishop/ss-10222052 이 좋은 글을 읽어보시면 레벨 디자인 총정리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공간을 최적화 하려는 방법을 기준으로 삼아 그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게임 플레이를 기획하는 접근이 더 재미있는 게임 디자인을 하는데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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